마크 애크바(Mark Achbar)와 제니퍼 애보트(Jennifer Abbott) 감독이 2003년 공동 연출한 다큐멘터리 "The Corporation"은 현대 기업이라는 거대 조직을 하나의 '법적 인격체'로 보고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획기적인 작품입니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법학 교수 조엘 바칸(Joel Bakan)의 저서 "The Corporation: The Pathological Pursuit of Profit and Power"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145분짜리 다큐멘터리는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기업이 헌법 수정 제14조를 근거로 '인간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획득한 이후, 어떻게 이윤 추구만을 목적으로 하는 병리적 존재로 발전했는지를 심층적으로 탐구합니다.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350만 달러를 기록하며 캐나다 출신 장편 다큐멘터리 중 역대 최고 흥행작이 되었고, 선댄스 영화제를 포함한 26개 이상의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등장인물과 줄거리
이 다큐멘터리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터뷰이들이 등장하여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합니다.
좌파 진영에서는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 언어학자이자 사회비평가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반세계화 운동가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 환경운동가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등이 기업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반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경영학 구루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자유시장 옹호 싱크탱크인 프레이저 연구소 관계자들은 기업의 역할과 주주 가치 극대화 의무를 옹호하는 입장을 제시합니다.
특히 인상적인 인물은 카펫 제조업체 인터페이스(Interface, Inc.)의 CEO 레이 앤더슨(Ray Anderson)으로, 그는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기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양심적 경영자로 묘사됩니다.
반면 의류 회사 CEO들은 자사 공장 노동자들의 착취 실태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둔감한 모습을 보이며, 광고 업계 임원은 어린이들에게 부모를 조르도록 부추기는 "잔소리 유발 기법(Nag Factor)"을 당연하게 여기는 냉혹함을 드러냅니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기단계에서 기업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간략히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원래 정부가 특정 공공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하던 기업이 19세기 중반 미국 대법원 판례를 통해 '법적 인격체(legal person)'로 인정받으면서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된 과정이 소개됩니다.
승단계에서는 DSM-IV(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의 진단 기준을 사용하여 기업을 사이코패스로 진단하는 독창적인 접근이 펼쳐집니다. FBI 자문 심리학자이자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로버트 헤어(Robert D. Hare) 박사는 "기업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라고 진단하며, 타인의 감정에 대한 냉담한 무시, 지속적인 관계 유지 불능, 타인의 안전에 대한 무모한 무시, 반복적인 거짓말과 속임수, 죄책감 결여, 법규 준수 실패 등 사이코패스의 모든 특징을 기업이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전단계에서는 구체적인 사례 연구들이 제시됩니다. 제3세계 노동자 착취를 통한 스웨트샵(sweatshop) 운영, 몬산토의 유전자 조작 소 성장 호르몬(rBGH) 관련 언론 보도 억압 사건, 나치 독일 시대 코카콜라의 환타 개발과 IBM의 홀로코스트 협력 의혹, 2000년 볼리비아 코차밤바의 물 민영화 저항 운동, 1933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을 상대로 한 기업들의 쿠데타 음모(Business Plot) 등이 다뤄집니다.
결단계에서는 경제학 용어인 '외부효과(externalities)'가 핵심 개념으로 등장합니다. 밀턴 프리드먼은 외부효과를 "거래 당사자 두 사람이 제3자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정의하며, 기업들이 자신들이 야기한 환경오염, 건강 피해, 사회적 비용을 타인에게 전가하도록 법적으로 설계되어 있음을 인정합니다.
관객들의 반응
2004년 북미 개봉 당시 "The Corporation"은 비평가와 관객 모두로부터 압도적인 호평을 받았습니다. 로튼 토마토에서 111개 리뷰 기준 90%의 긍정 평가와 평균 7.4/10점을 기록했으며, 메타크리틱에서는 28개 리뷰 기준 73점을 받았습니다.
로튼 토마토의 비평가 consensus는 "The Corporation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밀도 높고 사고를 자극하며 자본주의의 핵심 주장들에 대한 반박"이라고 평가했습니다. Variety의 데니스 하비(Dennis Harvey)는 "우리 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제도적 모델에 대한 놀랍도록 설득력 있고 재미있으며 심지어 선동적인 고발"이라며 "과도하게 편파적인 수사학을 피하고 다양한 인터뷰 대상자들을 배치한 대담한 구성"을 칭찬했습니다.
시카고 선타임스의 로저 에버트(Roger Ebert)는 "정보로 가득 찬 열정적인 논쟁작으로 저녁 식사 대화를 중단시킬 만한 내용"이라고 평가하면서도 145분의 상영 시간이 다소 길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냉철하고 예리하며 철저하고 정보가 풍부하다. 관객들에게 냉기를 남긴다"고 표현했고, 시애틀 포스트 인텔리전서는 "빠른 속도감, 매우 즐겁고 도발적"이라고 호평했습니다. IMDB에서 22,000명 이상의 사용자 평점 8.0/10을 기록하며 장기간 사랑받는 작품임을 증명했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배우는 경제·금융 용어
이 다큐멘터리는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핵심 경제·금융 용어들을 실제 사례와 함께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외부효과(Externalities)는 이 작품의 이론적 중심축으로, 두 당사자 간 거래가 거래에 참여하지 않은 제3자에게 미치는 간접적 비용이나 이익을 의미합니다. 자동차 배기가스로 인한 대기오염이 대표적인 부정적 외부효과인데, 자동차 제조사나 운전자는 대기오염의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제3자인 전체 사회 구성원들이 건강 피해를 입게 됩니다. 조엘 바칸 교수는 "기업은 의도적으로 외부효과를 창출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으며, 법적으로 사람들과 공동체, 자연환경에 미치는 피해를 고려하지 않고 비용을 외부화하도록 강제된다"고 설명합니다.
법인격(Corporate Personhood)은 기업이 헌법상 인간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보유하는 개념으로, 1886년 미국 대법원 판례에서 헌법 수정 제14조를 근거로 확립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기업은 언론의 자유, 재산권 등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도덕적 책임이나 양심은 결여된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주주 가치 극대화(Shareholder Value Maximization)는 기업 경영진이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법적 의무로, 밀턴 프리드먼은 인터뷰에서 "기업의 의무는 주주에게 있으며 이를 벗어나는 행위는 무책임하다"고 명확히 밝힙니다. 이 원칙은 경영진이 환경 보호나 노동자 복지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도록 법적으로 강제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합니다.
유한책임(Limited Liability)은 주주들이 자신이 투자한 금액 이상의 책임을 지지 않는 제도로, 이로 인해 기업이 저지른 범죄나 피해에 대해 개인 주주들은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됩니다.
현대 사회에 주는 시사점과 교훈
"The Corporation"은 기업 지배 구조의 근본적 문제점이 개인의 도덕성 결여가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되어 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대부분의 CEO들이 개인적으로는 윤리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주주 가치 극대화라는 법적 의무 때문에 환경 파괴와 노동 착취를 승인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이 존재합니다.
다큐멘터리는 기업 임원 로버트 몽크스(Robert Monks)의 말을 인용하여 "법을 준수할지 여부가 비용 효율성의 문제로 취급되며, 적발될 확률과 벌금이 준수 비용보다 낮으면 사람들은 이를 단순한 사업적 결정으로 본다"고 지적합니다. 실제로 기업들은 법을 위반하고 벌금을 내고 다시 법을 위반하는 악순환을 반복하는데, 이는 기업이 양심이나 죄책감을 느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업 구조가 본질적으로 전제주의적(despotic)이라는 점도 중요한 시사점입니다. 민주적 정부는 선출된 공직자들이 권력 분립과 견제와 균형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 반면, 기업은 소유주가 임명한 임원들이 모든 직원을 지배하는 비민주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품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기업이 야기한 오염과 사회적 비용을 기업 스스로 부담하게 만드는 것으로, 피구세(Pigouvian tax)와 같은 환경세를 통해 외부효과를 내부화하면 기업들이 이윤 보호를 위해 자연스럽게 오염을 줄이게 될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또한 법 위반에 대한 벌금을 기업 행동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게 책정하고, 경영진에게 형사적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론: 시스템적 변화의 필요성
"The Corporation"은 단순한 반기업 프로파간다를 넘어서 현대 자본주의의 제도적 설계 결함을 과학적으로 진단한 중요한 학술적 작품입니다.
이 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강점은 개인을 악마화하지 않고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한다는 점입니다. 450시간의 촬영 분량과 100시간의 인터뷰를 145분으로 압축한 이 작품은 처음 편집본이 33시간이었을 만큼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선댄스 영화제 관객상, 암스테르담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특별심사위원상, 캐나다 지니상 등 26개 이상의 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2020년에는 속편 "The New Corporation: The Unfortunately Necessary Sequel"이 제작되어 기업 지배의 문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줍니다.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기업을 더 책임 있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는 유권자로서 정부를 움직여 법과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환경 파괴, 노동 착취, 정보 조작 등의 문제는 개별 기업이나 경영진의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이윤 극대화만을 법적으로 강제하는 시스템의 필연적 결과이며, 따라서 시스템 자체의 근본적 개혁이 필요합니다. 경제·금융 지식을 갖춘 시민으로서 우리는 소비자이자 유권자로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고, 외부효과를 내부화하는 정책을 지지하며, 지속 가능한 자본주의를 위한 제도 개선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사려 깊은 비판 중 하나로, 경제와 금융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시청해야 할 필수 교육 자료입니다.